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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공교육은 죽지 않았다.

공교육은 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교육 정상화"를 이야기한다,
대학민국에서 학교는 건재하다.
학교와 공교육은 한번도 죽은 적이 없다.
세상에 문제 없는 일이나 조직이 없듯이, 학교에도 문제는 있다.
문제가 여전히 있고, 앞으로도 문제가 있겠지만, 정상화가 나올 정도는 아니다.
차라리 문제가 있어, 공교육과 학교는 생명력이 있다.

공교육은 죽지 않았다.
공교육이 죽었다면, 왜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가?
공교육이 죽지 않았으며, 정상화가 필요 없다는 역설이다.
학교가 아니라면, 불안하다.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사교육이라 부르는 학원 위주의 학습이다.
내 아이만큼은 남들보다 더 잘되길 바라는 과욕이다.
과욕이 부른 재앙인 학원을 통한 사교육이 문제다.

아이들이 학원과 선행학습에 치중할 거라면, 학교를 그만두는 편이 낫다.
믿지 못할, 실력도 없다고 판단하는 학교에서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이 가능한 일부를 빼고는 어쩔수 없이 "공교육"을 포기하지 못한다.
왜일까?
공교육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20년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교육 여건이 형편없이 낮았다.
교사 1인당 학생수, 참고서, 인터넷 강의, 동영상 강의, 학원 숫자 등
현재보다 좋았던 게 있었을까?
그때는 교육이, 공교육이 문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사의 자질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최악이었다.
현재는 교직이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믿음이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교사가 되기 위해 줄을 선다.
섣부르게 일반화하면 안 되지만,
예전에는 할 일이 없어서, 선생질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이런 말을 "교사"에게서 수업시간에 여러 번 들었다.
그래도 교육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좋은 학교 시설, 급식, 여유로운 교실, 우수한 교사.
도대체 공교육이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문제의 본질은 "내 아이만"은 특별히 더 잘 해야 하고, 뒤쳐져선 안 된다는,
거대한 죄수의 딜레마에 갇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놀이터에서 사라진 아이들,

셔틀버스에 태워져 학원으로 팔려가는 아이들,
선행학습으로 이미 알고 있는 고루한 것을 가르쳐 주는 학교.
수업에 관심없고, 딴짓하는 아이들에 관심을 잃은 교사.
가계를 위협하는 사교육비.
진정으로 원하는 바인가?

공교육은 "죽지 않았다"
공교육은 너무나도 "정상이다.
사교육, 학원을 정상화해야 한다.


"사교육 정상화"
6.25 이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의 교육을 살리기 위해 극약처방을 했다.
지방 지주, 유지들에게 사립학교를 개설하게 하고, 편의를 봐줬다.
국가와 사회가 감당 못하는 교육 수요를,
지방의 지주, 유지들에게 떠 넘기고, 사학재단을 유지케 한 것이다.
사학과 사립학교는 말 뿐이다.
미션스쿨이라는 종교재단이 세운 학교도 학생들을 마음대로 뽑지 못한다.
강기석 학생이 재단과 싸운 본질적인 이유다.
학생 선발권, 교과 편성, 3불 정책을 지키기만 한다면, 사립은 유지된다.
뒤집으면 사립에 "교육에 대한 헌신, 철학"은 없다.

사교육 정상화를 통해 공교육과 사교육의 경쟁 체제가 되어야 한다.
교육에 대한 철학과 자신감이 충만한 사립이라면,
국가의 지원을 포기하고, 학생선발권과 교과과정에서 독립해야 한다.
국가의 모든 지원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재정으로 운영한다.
사립에 들어가던 재정을 공교육으로 돌려 투자한다.
사립이 대략 80%다.
재정은 대략 50%가까이 투자되는 듯 한다(추정)
남는 재원으로 지금보다 더 좋은 급여와 근로조건을 교사에게 제공한다.
남는 재원으로 무상급식은 물론이고,
더 좋은 학습 시설과 다양한 교육과정을 도입할 수 있다. 


공교육과 사립학교-사교육의 경쟁이 시작된다.
무상으로 하는 공교육과 비싼 교육비를 내는 사립의 경쟁.
어떤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 좋을까?

"사교육 정상화"
역설적으로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 정상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공교육은 죽지 않았다.
공교육을 믿지 못할 뿐이다.
일상화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밀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학교"와 "공교육"을 믿는다면, 희망이 있다.
난 "학교"와 "공교육"을 믿는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집사람과 주위의 비아냥에도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학교와 공교육은 학습과 경쟁이 아니라,
놀이와 어울림을 배우고, 배려하는 민주시민을 키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게 이상주의라 하더라도, 믿고 가야 한다.

나는 공교육에 대해서 너무 신뢰하고, 세상 물정 모른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본질은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라 한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자격증 판매하는 곳이라고 비난한다.

2가지 가정을 해본다.


모든 학생들이 하바드나 MIT 수준의 학습 능력과 스펙을 가졌다고 가정해보자.
모두가 일류기업이나 공기업같은 신이 내린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모든 학생들이 모두 낙제점을 받을 정도라고 가정해보자.
기업은 어떻게 사람을 뽑을까?
동남아나 중국인으로 대체할까?

현재의 취업난은 학생들의 능력과 자질, 노력, 스펙과는 거의 연관이 없다.
80년대 학번들 중에는 수업을 제끼고 겨우 학점만 받아서 졸업한 사람들이 꽤 많다.
386들중 많은 이들은 졸업할 때 어디를 선택할까 고민했다.

현재의 취업난은 사회가 가진 생산력과 효율이 좋아졌어도 더욱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때문에 발생한다.
욕심을 줄이고 긴장을 늦추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떨어지면 다시 오를 수 없다. 

자본이 고도화되고,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구조가 개선되어,
자본과 대기업은 좋은 일자리를 순증가시킬 수 없다.
순감소 안시키면 다행이다.

현재 대한민국 수준의 산업이라면, 더 이상 창의력을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
고정화된 프로세스에 따라 점검하고, 조금씩 개선하는 노력만 하면 된다.
기술이 발달하면, 전문가의 영역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으로 바뀐다.
수치적으로 평균 영역이면 다 가능하지 않을까 추정해본다.

아이들을 하바드나 MIT, 카이스트에 보내야만 하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려면 학원에서 선행학습으로 밤늦게까지 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모르는 세상물정이다.

사실은 앞으로 10년 후,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공병호의 10년 후 한국은 예측불가능성과 불안감으로 사람들을 휘어 잡았다.
사실은 좌파 때문이 아니라 까마귀 우파때문이라는 것을 교묘히 감춰버렸다.
창의력은 학습이나 선행으로 도달하는 영역이 아니다.
실력은 선행한 아이들과 정상 이수중인 아이들을 비교하여 평가해선 안 된다.
10년 후를 예측못하니, 아이들의 미래가 불안하다.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거대한 죄수의 딜레마를 벗어나는 길은,
상대에 대한 신뢰. 
만인에 대한 신뢰.
 


결국 우리 부모님이 바라는 아이들은 

적절히 창의적이서 가족이나 학교생활에서 크게 어긋남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하는 그런 아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에게 지금껏 우리가 붙였던 수식어는

'창의적인 아이'가 아니라 '모범생' 아니던가? 

- 최인수, 창의성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