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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내가 떠난 보낸 선생님


이 글은 2009년 8월 24일에 쓴 글입니다. 선생님이 가신지 1년을 기다렸습니다. 너무 섣부르면 예의가 아니고, 너무 오래 기다리면 마음이 잊혀질지 모르겠습니다.

고인이 되신 고 김대중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내 고향 빛고을에서는 고 김대중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국회의원이여도, 한 당의 총재여도, 대통령 후보였을 때도, 또는 대통령에 당선된 1997년 겨울에도 모두 "선생님"이라 부른다.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처음부터 김대중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1979년 10월 김재규의 총알이 유신의 심장을 관통시켰던 때로 기억된다. 어른들은 김대중 선생님을 이야기했다. 박통이 죽었는데, 처음으로 들어보는 김대중 선생, 어딘가 낯선 이름이다. 그 뒤로 5.18이 다가오기 전까지 동네 평상에서, 친지들 모임에서 어느덫 익숙한 이름이 되어갔다.

1980년 5월이 다가오면서 꽤 많이 들었다. 시민군이 광주시내를 해방구로 만들었을 때 본 구호들은 "
김대중 선생"과 "살인마 전두환"에 대한 것이 주를 이뤘다. 밤에는 마루문짝에 솜이불을 걸어놓고, 갑작스러운 총소리나 싸이렌소리에는 벽장이나 옷장 뒤로 숨고, 낮에는 거리에 나가 금남로와 광주역, 버스터미날을 지나면서 버스 안에타고 있는 시민군들의 구호를 들으며 하루하루 버텼다. 어느 날 총소리가 지랄같이 콩볶은 다음에 고요가 찾아오고, 아침에 나가보니 시민군 버스는 한대도 보이지 않고, 길가에는 무장한 국군과 탱크만 보였다. 거리에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김대중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5월은 사라져갔지만, 김대중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줄어들지 않았고, 전두환이 누군인지 몰랐는데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사실에 어쩔 줄 몰랐다.
"살인마"가 대통령이라니.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후 대한민국은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정의가 뭔지 몰랐다. 바르고 의롭게 사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는데, 내 기억에 사전을 찾아봤던지, 누군가에게 물어봤던지,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의롭고 바르게 사는 거랑은 전혀 상관없다. 그러나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말을 들을때는 웬지 뿌듯해졌지만, 결국에 나에게 아무도 어떤 것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네에 YWCA 회관이 들어서면서 시끄러운 날들이 많았다. 기억이 가물하지만 1986년 여름에 전국 대학생 기독교 학생들 모임이 YWCA와 광주역 앞의 한빛교회를 사이에 두고 열렸다. 동네는 초토화되었다. 최루탄이 빵빵 터지고, 전경들이 뛰어다니고,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매스꺼운 거리를 달렸다. 망월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래로 흘러나왔다. "
5월 학살 원흉"부터 그리고 김대중 선생님 이야기도 들었던 거 같다. 공부 열심히 잘 해서 서울의 좋은 대학 갔다는 사람들이 시골까지 와서 저렇게 하는지 이해를 못했지만 흥겹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서글픈 오월의 노래는 끝까지 외우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월의 노래"는 샹송에 가사를 붙이고 곡조를 조금 다르게 해서 부른다. 나중에 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겨울연가"의 주제곡으로도 나온다. 
(오월의 노래에 대한 글이다. http://zhoto.tistory.com/49)

1987년 고등학생이 되었다. 학교에 가니 자율학습에 보충수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땡땡이 치기 시작했다. 여름이 다가올 무렵 갑자기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대학생형들과 함께 전경과 싸운다는 소식이 학교에 퍼졌다. 자율학습 땡치고 나갔다. 금남로, 충장로, 백운동, 전대병원앞으로 밤마다 짱돌을 깨고 최루탄을 피하며 싸웠다. 옛날과 달랐다. "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더라!  호헌철폐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뭔지는 모르지만 전두환이 발표했다는 것은 알았다. 우리가 사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했었는데, 독재라니. 대통령이 살인마 전두환이기 때문에, 그놈 때려 잡는거라 알아먹었다. 최루탄을 뒤집어 쓰고 밤늦게 또는 새벽에 들어갔다. 다음날 학교에서는 땡땡이 대가로 두들겨 맞았다. 우리는 귀동냥으로 들은 노래를 서로 익히고, 주워온 유인물에 쓰여진 어려운 말들을 해석하고, 학교에서 쉬다가 또 땡땡이를 쳤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어느 늦은 오후 시위가 도청앞 YMCA 앞에서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찍 튀었다. YMCA 앞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서 있었다. 약속한 6시가 다 되어 가는데, 누가 나온다는 말인가? 누가 모이기는 한단 말인가? 금남로에는 자동차가 그대로 다니고 있고, 사람들도 아무 일 없을 듯 한데,. 6시가 살짝 지나자, 누군가 YMCA 앞을 무단횡단 한다.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자, 갑자기 군중이 되고 시위가 되고... 도청과 전남경찰청쪽에서 전경들이 밀려들고... 중앙교회까지 후퇴하고 다시 서현교회앞까지 밀리고. 어느 날인가 죽어라 짱돌 깨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과 아버지가 날 찾으러 왔다. 무사한 것을 보시고 "일찍 들어와라, 다치지 말라"고 먼저 가셨다. 마스크, 치약, 담배연기로 얼굴을 지키며 짱돌로 안될 때, 어느 날인가 부터 전경들의 살인적인 진압에 맞서는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너무 멋있다. 검은 하늘을 가르며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는 불꽃들. 이건 아무리 졸라도 대학생들이 안준다.

전경들 무장해제시키고, 산꼭대기로 지붕타고 도망가고, 집창촌 쪽방에 숨고, 달동네로 달리고, 담벼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러기를 또 얼마나 했었나? 갑작스러운 6.29 선언이 나왔다. 아.. 오늘만 더 밀어 붙이면 될텐데, 왜 허무하게 시위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 못했다. 그러나 "
이제는 선생님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안도의 이야기들이 6.29를 대체했다. 내가 왜 싸웠는지 많이 허무했다. 어른들이 다들 그렇게 이야기 하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밤마다 가투 나가는라고 학교에서 많이도 맞았구나.

6.29 선언으로, 1987년 선생님이 대통령 선거에 나가시게 되었다. 선생님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노태우에 비해 야3당의 쪼개진 후보가 불안하다는 소리와 함께 후보 단일화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당연 단일화된 후보는 선생님이었다. 선거 유세를 다녔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김대중, 김영삼 뭐 이런 구호를 외치며 놀다 잡혀서 흠씬 맞았다. "
투표권도 없는 놈들이, 니깐 놈들이 정치를 알어~~" 우울하다.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결국 노태우가 되었다. 국민이 만들어준 기회를 날려버리다니.. 그때부터 삼김이 싫었다. 1987년 선거때 조선대에서 열린 유세에서 선생님을 먼발치에서 처음 보았다. 날이 매우 추웠고,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고, 그냥 그랬다.

1990년 대학에 들어갔다. 갑자기 5월인가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3당합당을 해서 민자당을 만들었다. 선생님만 왕따 당하신거다. 역시 선생님이다는 소리가 나왔다. 우리 섹터는 그냥 왕따로 정리하기로 했다. 구구절절이 설명하면 길다. 아무튼 선생님이 졸 불쌍해 보였다. 보수대연합을 깨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마치 전투가 시작된 것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어디에도 선생님을 위한 구호나 슬로건은 없었다. "
해체 민자당, 사수 전노협"이라는 어려운 구호였다. 선생님이 불쌍한 처지였다는 것과 함께 나와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갈라서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온다.

1992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연속해서 학사경고를 받지 않나, 배구를 하다 다리를 다치고 깁스를 하고, 내가 좋아했던 선배가
점검농성으로 잡혀들어가고, 급기야는 절친한 친구가 전경련회관을 점검하고 뉴스에 나왔다. 선생님께는 1992년은 87년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였으며, 고향 어르신들 모두 이번만큼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는 독자후보를 내세우고 선거운동을 했다. 87년 처럼 투표권이 없다고 맞을 일도 없었다, 백기완 선생을 후보로 내세우고 선거운동본부를 꾸려 시대를 뚫고 가기로 했다. 영장이 나왔다. 다리와 학고 때문에 휴학을 했었는데,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투표일은 18일, 입대일은 19일. 기호 8번을 진하게 눌렀다. 가족, 친지들로부터 비난을 들었다. 입대전 김영삼이 당선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광주역에서 떠나는 논산행 열차는 씁쓸했다. 새벽까지 마신 술도 안 깼을 뿐더러, 26개월 군생활을 버틸 자신이 있는지도 몰랐다. 훈련소에서 가끔  훈련을 나갈때 시골 쓰러져가는 담벼락에 희뿌옇게 붙어 있는 후보들 포스터를 보면서 머리 속이 회색이 되어가고 추억들은 흑백사진이 되어 점점 빛이 바래진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과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정계 은퇴도 하셨고 했으니.. 어르신들은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이 꼬옥 나오실 것이며 대통령이 되실 거라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계셨다. 1997년 겨울 선생님이 또 대통령 선거에 나오셨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셨다. 그러던지 말던지였다. 투표일이 다가오자 계속해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꼭 투표해라!! 안찍어도 좋으니 꼭 투표는 해라!! 투표일 아침 느긋하게 자고 있는데 큰아버지까지 전화가 왔다. 동생과 논의했다. 그냥 가서 찍고 오자고. 그리고 삼겹살 먹었다.
결국 선생님이 당선되었다.

고향에 내려가면 이제는 살판이 날 것이라는 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살판은 나지 않았다. 재빠르게 한 자리씩 차지하는 날렵한 사람들 빼고는 그냥 정의 사회일뿐이었다. 아무도 어떤 것도 주지 않는다는 사회 말이다. 명절이나 모임때 선생님이야기를 하고 희망 섞인 이야기를 했지만 별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선생님께서 평양에서 김정일과 6.15 공동선언도 하시고 노벨상도 타시고, 무사히 퇴임까지 하시고,..

선생님께서 가셨다고 한다.
내가 선생님을 알고 지낸지 무려 30년 세월이 넘는다.
내 인생의 30년 세월에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움뿍 새겨진 자취가 꽤 깊었나 보다. 이제는 선생님을 조용히 보내드릴 때가 된 것 같다.

처음 알게 된 신비로웠던 선생님과 국장을 치루고 현충원에 안장된 대통령님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적어도 선생님의 장지가 현충원이 아니라 광주 망월묘지의 무명열사의 묘처럼 소박하게 묻히길 유언하실 줄 알았다. 빈소도 현재 텅빈 광주의 전남도청사로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국장이든 국민장이든 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기대는 깨졌다. 선생님이 나라의 큰 정치지도자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든 아니든 그냥 선생님일 뿐인데. 내 마음속에 옹고집처럼 자리잡고 있는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깨야만 선생님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장례기간 내내 아팠다.

"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라고 하셨다던데,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생이 아름다운지 잘 모르겠다.
아직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데 아름다운지 어찌 알수 있으랴.
역사가 발전하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철없던 어린 시절처럼 살아도 좋을 거 같은데. 
굳이 어렵게 발전까지 해야 되는지. 
가신 선생님께 미안한 이야기지만
선생님의 장남에게 인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 같고, 
이대로라면 나도 그럴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다.

내가 떠나 보내드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