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전에 선배가 "이태석 신부님"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 그때는 이태석 신부님 영화가 전국에서 소리없이 퍼져 나가는 시기였다. TV에서도 이태석 신부님 다큐인가를 했었는데, 이야기도 건성으로 듣고, 둘다 별 관심이 없이 지나쳤다.
갑자기 이태석 신부님 이야기가 궁금했다. 마침 "산 위의 신부님"이라는 박기호 신부님 이야기도 있고 해서, 두 권을 주문했다. 주문한 날 올 줄 알았는데 다음날 왔다. 모처럼 만에 야근으로 집에 새벽 3시 들어갔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책이 있었다. 피곤하지만 그냥 잘 수 없어, 바람처럼 열어보았다. 한 번 열어보고 끝까지 갔다. 덮고 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아직 읽었다고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을 한 시간에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는가?
그리스도교나 카톨릭이라는 시선을 버리고 책을 봤다.
한 사람의 삶이, 인생을 걸고 하나의 목적에 집중한다는 점.
하나의 목적이 이타적인 나눔이라는 점.
목적을 위해 선량한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실행한다는 점.
여러가지 울림이 나를 때린다.
스스로 나태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귀찮고 어렵다는 이유로 나눔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재능을 썩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중요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지은이의 글 쓰기가 참 색다르다.
정감있지만, 너무 가깝지도 않게 거리를 유지한다.
담백하다.
김훈의 담백함이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라면
지은이 우광호님의 담백함은 시골 할머니 댁의 구들장의 따뜻함과 그 따뜻함에 대한 여운을 남긴다. 구들장은 가끔 매섭게 뜨겁기도 하다.
이렇게도 글을 쓸수 있다는 게 너무 존경스럽다.
다시 꼭 읽어봐야겠다.
142쪽
불공평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저들이 왜 저토록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건지, 영양 상태만 좋으면 쉽게 이길 수 있는 말라리아나 홍역으로 죽어가고, 배앓이로 죽고, 지뢰를 밟아 죽고, 총 맞아 비명횡사합니다. 아이들이 열병에 걸려 신음하면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마당에 물을 뿌려놓고 열이 내리길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엄청난 쓰레기를 만드는 우리나라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생각하면, 세상이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의 1퍼센트만이라도 이들과 나누면 이들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입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굶주림이나 갖가지 질병 앞에서 너무 쉽게 죽어가는 이곳 사람들, 좋은 병원에서 좋은 약으로 좋은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운명으로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이곳 사람들을 볼때면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며 치료 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를 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144쪽
한국에서는 손만 뻗으면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지 시원한 콜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 배가 고플 때면 어디서든지 쉽게 식당을 찾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전기는 또 어떻습니까? 아프리카에선 전기 쓸 때는 휴대폰 배터리 충전 하듯이 늘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한국에선 전기의 감사함을 느끼기 힘듭니다. 밤에도 늘 환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바치는 '보다 많이 가지게 해 달라'는 기도 대신 가끔은 '보다 적게 가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우리들에겐 더 어울릴 듯합니다.
169쪽
그런데 아이들의 손에 너덜너덜한 책이 들려 있었다. 전기가 없어 밤에 책을 읽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보름달 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다.
"달빛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습니다."
170쪽
이태석 신부는 이후 전등 세 개가 달려 있는 간이성당을 밤에 아이들이 자습실로 사용하도록 했다. 병원의 환자 대기실에도 전등을 달아 야간 학습실로 내주었다. 태양열을 이용해서 전기를 일으키기 때문에 용량이 부족해서 밤 9시까지만 공부를 하도록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공부할 시간을 더 늘려 달라고 떼를 썼다. 이태석 신부가 난처해하자, 그러면 30분만이라도 더 늘려 달라고 졸랐다. 이태석 신부가 난처해하자, 그러면 30분이라도 더 늘려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이 신부는 비싼 기름을 써서 전동기를 돌려가며 9시 30분까지로 공부시간을 늘렸다. 몇 달이 지나자 공부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은 9시 30분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쳤다.
"30분만 더 공부하게 해주세요."
이 신부는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공부하라고 애원을 해도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은데, 톤즈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래,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공부해봐라."
그렇게 해서 공부시간은 밤 11시까지로 늘어났다.
187쪽
예수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사랑의 드러나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일치입니다. 너와 내가 일치되지 않으면 사랑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일치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말의 일치, 생각과 생각의 일치가 아닙니다. 내 삶의 짜집기와 다른 사람 삶의 짜집기가 일치해야 합니다. 마치 저의 소년 시절이 아프리카 아이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나의 삶이 다른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의 사람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가 중요합니다. 이 일치 속에서 우리는 참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께서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23쪽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이 아이들이 제게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눈빛만 보면 부끄러워지나 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것만 같아 미안해지나 봅니다. 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것들을 저 혼자 다 갖고 있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나 봅니다. 이제 제가 가진 것들을 조금씩 나누어야겠습니다.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들을 이쯤에서 멈추어야겠습니다. 이제 마음에서 맴돌던 그 다짐들을 행해야겠습니다.
나누면서도 제가 더 풍요로워짐을 느낍니다. 제 것을 나누어주었는데도 아무 것도 줄어들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나눌 것이 더 많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나눔은 참 신기한 요술 항아리입니다. 게다가 제 마음에 기쁨과 행복까지 선물로 주니 아무래도 이 나눔은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비밀열쇠인 것만 같습니다.
224쪽
"멋진 말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순 있어도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갑자기 이태석 신부님 이야기가 궁금했다. 마침 "산 위의 신부님"이라는 박기호 신부님 이야기도 있고 해서, 두 권을 주문했다. 주문한 날 올 줄 알았는데 다음날 왔다. 모처럼 만에 야근으로 집에 새벽 3시 들어갔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책이 있었다. 피곤하지만 그냥 잘 수 없어, 바람처럼 열어보았다. 한 번 열어보고 끝까지 갔다. 덮고 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아직 읽었다고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을 한 시간에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는가?
그리스도교나 카톨릭이라는 시선을 버리고 책을 봤다.
한 사람의 삶이, 인생을 걸고 하나의 목적에 집중한다는 점.
하나의 목적이 이타적인 나눔이라는 점.
목적을 위해 선량한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실행한다는 점.
여러가지 울림이 나를 때린다.
스스로 나태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귀찮고 어렵다는 이유로 나눔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재능을 썩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중요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지은이의 글 쓰기가 참 색다르다.
정감있지만, 너무 가깝지도 않게 거리를 유지한다.
담백하다.
김훈의 담백함이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라면
지은이 우광호님의 담백함은 시골 할머니 댁의 구들장의 따뜻함과 그 따뜻함에 대한 여운을 남긴다. 구들장은 가끔 매섭게 뜨겁기도 하다.
이렇게도 글을 쓸수 있다는 게 너무 존경스럽다.
다시 꼭 읽어봐야겠다.
142쪽
불공평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저들이 왜 저토록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건지, 영양 상태만 좋으면 쉽게 이길 수 있는 말라리아나 홍역으로 죽어가고, 배앓이로 죽고, 지뢰를 밟아 죽고, 총 맞아 비명횡사합니다. 아이들이 열병에 걸려 신음하면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마당에 물을 뿌려놓고 열이 내리길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엄청난 쓰레기를 만드는 우리나라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생각하면, 세상이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의 1퍼센트만이라도 이들과 나누면 이들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입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굶주림이나 갖가지 질병 앞에서 너무 쉽게 죽어가는 이곳 사람들, 좋은 병원에서 좋은 약으로 좋은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운명으로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이곳 사람들을 볼때면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며 치료 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를 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144쪽
한국에서는 손만 뻗으면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지 시원한 콜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 배가 고플 때면 어디서든지 쉽게 식당을 찾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전기는 또 어떻습니까? 아프리카에선 전기 쓸 때는 휴대폰 배터리 충전 하듯이 늘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한국에선 전기의 감사함을 느끼기 힘듭니다. 밤에도 늘 환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바치는 '보다 많이 가지게 해 달라'는 기도 대신 가끔은 '보다 적게 가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우리들에겐 더 어울릴 듯합니다.
169쪽
그런데 아이들의 손에 너덜너덜한 책이 들려 있었다. 전기가 없어 밤에 책을 읽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보름달 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다.
"달빛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습니다."
170쪽
이태석 신부는 이후 전등 세 개가 달려 있는 간이성당을 밤에 아이들이 자습실로 사용하도록 했다. 병원의 환자 대기실에도 전등을 달아 야간 학습실로 내주었다. 태양열을 이용해서 전기를 일으키기 때문에 용량이 부족해서 밤 9시까지만 공부를 하도록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공부할 시간을 더 늘려 달라고 떼를 썼다. 이태석 신부가 난처해하자, 그러면 30분만이라도 더 늘려 달라고 졸랐다. 이태석 신부가 난처해하자, 그러면 30분이라도 더 늘려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이 신부는 비싼 기름을 써서 전동기를 돌려가며 9시 30분까지로 공부시간을 늘렸다. 몇 달이 지나자 공부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은 9시 30분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쳤다.
"30분만 더 공부하게 해주세요."
이 신부는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공부하라고 애원을 해도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은데, 톤즈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래,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공부해봐라."
그렇게 해서 공부시간은 밤 11시까지로 늘어났다.
187쪽
예수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사랑의 드러나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일치입니다. 너와 내가 일치되지 않으면 사랑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일치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말의 일치, 생각과 생각의 일치가 아닙니다. 내 삶의 짜집기와 다른 사람 삶의 짜집기가 일치해야 합니다. 마치 저의 소년 시절이 아프리카 아이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나의 삶이 다른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의 사람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가 중요합니다. 이 일치 속에서 우리는 참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께서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23쪽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이 아이들이 제게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눈빛만 보면 부끄러워지나 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것만 같아 미안해지나 봅니다. 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것들을 저 혼자 다 갖고 있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나 봅니다. 이제 제가 가진 것들을 조금씩 나누어야겠습니다.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들을 이쯤에서 멈추어야겠습니다. 이제 마음에서 맴돌던 그 다짐들을 행해야겠습니다.
나누면서도 제가 더 풍요로워짐을 느낍니다. 제 것을 나누어주었는데도 아무 것도 줄어들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나눌 것이 더 많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나눔은 참 신기한 요술 항아리입니다. 게다가 제 마음에 기쁨과 행복까지 선물로 주니 아무래도 이 나눔은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비밀열쇠인 것만 같습니다.
224쪽
"멋진 말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순 있어도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