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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의 신부님

불편한 삶이 순교보다 어렵다(237쪽)
정말 그렇다.
우리 집 사람도 불편한 삶때문에 무조건 시골로는 안 가겠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계속 신부님들 이야기를 읽고 있다.

산 위의 신부님은 어쩌면 인연이 닿아 있는 것일까? 농사 이야기도 그렇고, 밭에 가는 길에 경기도 광주의 "이배재"를 넘어가는데, 길을 걸어가신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49쪽
신앙인은 지금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정화의 불길에 태워볼 필요가 있다. 금도 강철도 그렇게 제련된다. 내가 추구하는 공동체 마을도 꼭 필요하다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이루어질 일이고, 아니라면 애만 쓰고 망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안 되거든 "부르심으로 믿고 헌신적으로 노력했는데 내 소명은 아닌 것 같더라" 하고 물러서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기도의 정화'이다.

56쪽
너무 가까이 앞서가는 걸음은 가치가 적고, 너무 떨어져 가는 걸음은 현실성이 적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항상 세 걸음 앞서가는 사람을 두 걸음 앞선 자가 따르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일반화시키며 진
보해 왔다. 인문학도 과학도 모두 그랬다.

"변혁의 시대에는 이상을 외치는 자가 먼저 죽임을 당하고, 뒤따르는 자는 감옥에 가거나 불이익을 당하고, 관망하는 자가 그 열매를 먹는다"고 했다.

67쪽
선생님이 묻는다.
"눈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요?
도시 아이가 대답한다. "물이 됩니다."
산골 아이가 대답한다. "봄이 됩니다."

선생님이 묻는다. 
"이 두 마리의 사슴 그림은 무엇을 뜻하지요?"
도시 아이가 대답한다. "먹이를 두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산골 아이가 대답한다. "짝짓기를 하려고 합니다."

80쪽
진화론적 탐구는 인간의 기원을 밝혀보려는 과학이다. 반면에 창세기는 생명의 기원을 밝히려는 목적의 과학서가 아니라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려는 교훈서이다.

125쪽
'우리의 직업은 농부다!'
첫째, 창조와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생태농업을 하자.
둘째, 지역 농민들의 관행 작물과 농법을 충실히 배우자.
셋째, 농산물 가공이나 수익성 특화 작목은 추후에 궁리하자.

174쪽
행위는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다. 몸이라는 물건은 마음먹은 대로 작동해주 않는다. 책상 앞의 지성과 흙 위의 몸은 대단히 다른 차원이다.

175쪽
귀농, 귀촌의 의지가 확실하다는 전제 아래 나느 세 가지를 염두에 두라고 말하는데, 모두 워밍업 차원이다.
첫째, 집을 구하는 문제다. 1차로 면소재지 정도에 셋방을 얻기를 권장하고 싶다.
둘째, 농부로 살아갈 몸을 만드는 일이다.
셋째, 문화생활의 개조다. 지출을 과감히 정비해야 한다. 차량을 더블캡 정도의 화물차로 바꾸고, 버스 이용을 생활화하고, 통신비도 줄여야 한다.

177쪽
하늘은 때때로 폭우를 쏟아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다리를 끊어 되돌아가게도 한다. 여태 삽집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살아온 몸임에도 농촌에 마음이 끌린다면, 일순간의 잡념망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영감의 빛이고 창큼 사이로 보이는 생의 미래일 수 있다. 문을 열면 새로운 세상이 나타난다.

178쪽
밭의 농작물에 물을 주는 수고는
비가 오면 보잘것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하찮은 수고가 없다면 농작물은 이미 말라 죽었을 것이고
비가 와도 소용없게 된다.

가난한 이와 밥을 나눔이 그러하다.

190쪽
그에 비하면 홍씨의 의식과 생활태도는 확실하다. 자기 정체의 투철성과 실천성을 느끼게 한다. 홍씨를 볼 때마다 나는 사제로서 얼마나 믿음에 투철하게 일상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한다. 또한 내가 진정으로 진보 진영에 속하는지도 묻는다. 비평하는 사유만 날카롭고 행동하는 실천에서는 무기력한 '신념의 노화'가 진행 중인 것인 아닌지 질문한다.
나는 이발관 홍씨처럼 의식과 생활에서 일치성을 가졌는가? 사제로서 세상에 대한 예언직의 소명이 무력화, 왜소화하지는 않았는가? 복음 정신과 역사의식을 가까운 이웃들과 공유하고자 노력했는가? '좌파'라는 틀을 능동적으로 수락하며 역사 발전의 창조적 동력이 되고 있는가? 이것은 나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사목자이자 지식인이며 진보 진영에 속한다고 여기는 모든 지성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205쪽
그런데 한편으로 왜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고 있는 걸까? 귀농이건 귀촌이건 서울을 떠나는 것은 '작은 삶'을 구하는 것이다. 작은 삶의 평화를 누리면서 희망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작은 삶에는 사람이 살아 있고, 인정이 살아 있고, 공동체성이 있다. 자연도 생태도 함께 있다. 거대한 공룡은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하지만,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작은 삶에는 날마다 죽어도 살아다는 민초의 생명력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
비닐 멀칭을 과학이라고 예찬하신 점이 걸린다. 비닐 멀칭은 과학이 아니라 공학의 영역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가 오묘한 과학인데.  비닐 멀칭을 선택하면 지속 가능한 농업이 불가능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