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래와 심형래 디워에 대해서 말이 많다. 방송국 토론 프로그램 주제로 다뤄질 정도고, 인터넷 곳곳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니 많은 정도가 아니다. 어쨌든 여러가지 부정적인 말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디워 홍보는 국내에서만큼은 대성공이다. 영화관 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히나 좀 느낌이 이상하게 안 땡기는 영화는 쳐다보지도 않는데, 디워를 봐야하나 충동이 들 정도다.
0. 영구아트무비 개발자, 디자이너를 생각하자.
심형래와 디워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영구아트무비에서 열악한 환경이나 작업 조건을 견디고 묵묵히 작업해온 실제 작업자들의 이야기도 없거니와 그들의 목소리도 없다. 오직 심형래만이 화살을 받고 있다. 추측해보건데 그동안 몇 번의 고비들을 넘겼을 것이다. 아니라면 행복한 것이고.. 월급이 끊기고, 영화가 잘 되는 것인지 불안도 했을 것이고, 이것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역경을 이기고 열악한 환경에서 CG만큼은 괜찮다라는 평가를 나오게 한 개발, 디자이너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없거나 무시되는 것이 아쉽다. 어차피 세상일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지만...
이번 영화평이나 평론, 또는 비판, 비난을 보면서 사람들이 참 복잡한 생각을 하고 사는구나 하고 느낀다. 영화를 영화로 보면 되지 왜 이거 저거 끌고 들어오는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고 살면 되지 남들이 뭐라고 한다고 못한고 사는 것인지, 그러면서 그런 분위기를 욕하는지.
1. 제작자 심형래와 감독 심형래를 분리해서 이야기해야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보면 제작자와 감독 역할 2가지를 모두 한 심형래에게 칭찬과 비판이 있다. 칭찬하는 사람은 제작자로써 심형래를 칭찬하면서 그걸 감독의 작품인 영화에까지 이입시킨다. 비난하는 사람은 영화의 완성도를 가지고 비난하면서 이를 제작자 역할까지 싸잡아 비난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100억 투자금만 들어가도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모으던 한국영화계에서 마이너리그에 속했다는 심형래가 300억을 모아서 영화까지 만들었다면 제작자로써 문제는 없다고 본다. 이미 심형래는 마이너가 아니라 충무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주류가 된 것이다.
영화를 비판하는 평론가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여러가지 측면에서 완성도나 스토리 등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럼 감독으로써 심형래가 책임지면 되고, 이후에 다른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면 아마도 적절한 감독과 작업을 하거나 좀더 공부를 해서 메꿔야 할 것이다. 그에게 그런 재능이 없다는 것을 다음 작품에서도 보여준다면 아마 그때는 역시 심형래는 그냥 제작만 하세요 한 마디로 정리되지 않을까.
2. 마케팅을 비난하면, 누가 마케팅하라는 것인지?
무슨 애국주의니, 인간시대를 끌고 들어왔다고 하는데, 영화를 만든 제작자나 배급사입장에서는 불법이 아닌 모든 마케팅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감독이야 예술을 따져서 영화를 만들겠지만, 시장으로 나온 영화는 예술이라는 특징과 함께 상품이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고, 시장에서 유통되고 고객들이 선택할 수 있는 도구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마케팅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마케팅의 수단이 애국주의든 인간시대든 눈물을 자극하든 그게 무슨 잘못인지. 이것을 영화자체로 연결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문화비평가라는 진중권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마케팅이라는 결과로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추론을 한다. 영화가 완성도가 떨어질 것라는 예상과 그렇기 때문에 애국주의 요소나 눈물에 호소하는 그런 기획을 했을 것이다라는 추론을.. 예상에는 영화를 홍보하려고 봤더니 필이 꽂히는 스토리가 없으니 홍보와 마케팅 방법을 전환한 것일 뿐이다.
3. 영화와 영화의 가치는 무엇이고 평론할 가치가 있는 영화가 따로 있는가?
토론을 보다보니 영화가 무엇인가, 그리고 평론이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그들 입으로 냉정하게 영화를 평론해야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대중들이 우매하게 잘못된 작품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평론가들만이 영화를 또는 문화, 예술을 제대로 볼수 있다는 선민의식의 표현일 뿐이다.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정보를 유통시켜주는 현대사회에서 평론가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디워의 경우처럼 평론이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 되니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아닐까!
대중들은 영화를 보는 기준이 다양하다. 누군가는 아이들의 원성으로, 젊은 청춘들은 데이트로, 또는 시간때우기로, 또는 누군가가 재밌다고 해서 호기심으로 영화관으로 간다 (또는 나처럼 컴퓨터로 보겠지.) 그들에게 영화에 대한 평론은 크게 관심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입소문이 중요하다.
재밌더라.
반전이 기가 막힌다.
다른 것은 몰라도 CG 하나는 죽여주더라.
영화를 같이 봤더니, 애들이 아빠가 최고다라고 한다. 보람을 느낀다.
과연 평론가들은 이런 대중들의 감상이나 추억에 대해서 생각이나 할까? 그들은 영화를 보고 혹시 혹평할 거리만 찾는 것은 아닐까? 무엇인가 자신들이 좀더 뛰어나고 살아있다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것이라면 나처럼 아예 보지 않는 것이 좋다.
4. 진중권의 스토리 부재론에 반론
진중권은 토론에서 영화가 스토리가 없다고 했다. 그 근거로 스포일러에 가깝게 스토리를 다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여자 하나 구하자고 군단에 가까운 괴물들이 나오냐고, 그게 말이 되냐고 했다. 그 이야기는 개연성이 없으니 스토리가 없다는 것이다. 개연성이란 현실에 있을 법한 그런 성질이다. 즉 스토리가 개연성이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디워는 개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워의 이무기는 뭔가? 그게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인가? 개연성이 있는가?
진중권은 장르에 충실하라고 한다.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SF아닌가? 그리고 디워는 SF에 충실했고.. 그렇다면 진중권이 SF에 충실한 영화를 혹시 역사영화나 연애영화로 본 것은 아닐까. 대략 그의 안목에 안습이다.
그리고 삼백은 플롯이 있다고 한다. 삼백은 봤지만 내 느낌에는 예술이고 나발이고 없다. 그냥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삼백은 있다인데, 디워는 없다고만 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시민논객이 찾은 근거에는 진중권이 삼백에 스토리가 적다고 쓴 글이 있다. 이건 모순이 아니라 조삼모사일뿐이다. 난간한 상황이니 근거가 없을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여자하나때문에 군단급 이상이 싸운 전쟁이 있다. 바로 헬레네를 두고 벌어진 트로이 전쟁이다. 이에 대한 소설도 있고 영화도 만들고 하니 개연성을 넘어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거 아닌가?
끝으로 아마도 난 디워를 보지 않을 것같다. 우리집 꼴통이 유치원에서 디워 이야기를 듣고 보자고 조르지 않는다면 별반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 그런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얼마전 본 라따뚜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평론에 대한 글을 붙인다. 아마도 이 시점에 적절한 글이 아닌가 싶다.
세상은 새로운 재주나 창작물에 관대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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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면 비평이라는 작업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위험부담이 없을 뿐더러 우리의 평론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젠척 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미있는 나쁜 말들을 잔뜩 적어 놓는다. 하지만 쓴소리를 잘하는 우리 평론가들은 어쩌면 겉모습만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것들이 어쩌면 우리의 비평보다 더 의미가 있는 건인지도 모른다.
0. 영구아트무비 개발자, 디자이너를 생각하자.
심형래와 디워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영구아트무비에서 열악한 환경이나 작업 조건을 견디고 묵묵히 작업해온 실제 작업자들의 이야기도 없거니와 그들의 목소리도 없다. 오직 심형래만이 화살을 받고 있다. 추측해보건데 그동안 몇 번의 고비들을 넘겼을 것이다. 아니라면 행복한 것이고.. 월급이 끊기고, 영화가 잘 되는 것인지 불안도 했을 것이고, 이것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역경을 이기고 열악한 환경에서 CG만큼은 괜찮다라는 평가를 나오게 한 개발, 디자이너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없거나 무시되는 것이 아쉽다. 어차피 세상일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지만...
이번 영화평이나 평론, 또는 비판, 비난을 보면서 사람들이 참 복잡한 생각을 하고 사는구나 하고 느낀다. 영화를 영화로 보면 되지 왜 이거 저거 끌고 들어오는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고 살면 되지 남들이 뭐라고 한다고 못한고 사는 것인지, 그러면서 그런 분위기를 욕하는지.
1. 제작자 심형래와 감독 심형래를 분리해서 이야기해야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보면 제작자와 감독 역할 2가지를 모두 한 심형래에게 칭찬과 비판이 있다. 칭찬하는 사람은 제작자로써 심형래를 칭찬하면서 그걸 감독의 작품인 영화에까지 이입시킨다. 비난하는 사람은 영화의 완성도를 가지고 비난하면서 이를 제작자 역할까지 싸잡아 비난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100억 투자금만 들어가도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모으던 한국영화계에서 마이너리그에 속했다는 심형래가 300억을 모아서 영화까지 만들었다면 제작자로써 문제는 없다고 본다. 이미 심형래는 마이너가 아니라 충무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주류가 된 것이다.
영화를 비판하는 평론가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여러가지 측면에서 완성도나 스토리 등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럼 감독으로써 심형래가 책임지면 되고, 이후에 다른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면 아마도 적절한 감독과 작업을 하거나 좀더 공부를 해서 메꿔야 할 것이다. 그에게 그런 재능이 없다는 것을 다음 작품에서도 보여준다면 아마 그때는 역시 심형래는 그냥 제작만 하세요 한 마디로 정리되지 않을까.
2. 마케팅을 비난하면, 누가 마케팅하라는 것인지?
무슨 애국주의니, 인간시대를 끌고 들어왔다고 하는데, 영화를 만든 제작자나 배급사입장에서는 불법이 아닌 모든 마케팅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감독이야 예술을 따져서 영화를 만들겠지만, 시장으로 나온 영화는 예술이라는 특징과 함께 상품이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고, 시장에서 유통되고 고객들이 선택할 수 있는 도구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마케팅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마케팅의 수단이 애국주의든 인간시대든 눈물을 자극하든 그게 무슨 잘못인지. 이것을 영화자체로 연결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문화비평가라는 진중권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마케팅이라는 결과로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추론을 한다. 영화가 완성도가 떨어질 것라는 예상과 그렇기 때문에 애국주의 요소나 눈물에 호소하는 그런 기획을 했을 것이다라는 추론을.. 예상에는 영화를 홍보하려고 봤더니 필이 꽂히는 스토리가 없으니 홍보와 마케팅 방법을 전환한 것일 뿐이다.
3. 영화와 영화의 가치는 무엇이고 평론할 가치가 있는 영화가 따로 있는가?
토론을 보다보니 영화가 무엇인가, 그리고 평론이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그들 입으로 냉정하게 영화를 평론해야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대중들이 우매하게 잘못된 작품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평론가들만이 영화를 또는 문화, 예술을 제대로 볼수 있다는 선민의식의 표현일 뿐이다.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정보를 유통시켜주는 현대사회에서 평론가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디워의 경우처럼 평론이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 되니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아닐까!
대중들은 영화를 보는 기준이 다양하다. 누군가는 아이들의 원성으로, 젊은 청춘들은 데이트로, 또는 시간때우기로, 또는 누군가가 재밌다고 해서 호기심으로 영화관으로 간다 (또는 나처럼 컴퓨터로 보겠지.) 그들에게 영화에 대한 평론은 크게 관심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입소문이 중요하다.
재밌더라.
반전이 기가 막힌다.
다른 것은 몰라도 CG 하나는 죽여주더라.
영화를 같이 봤더니, 애들이 아빠가 최고다라고 한다. 보람을 느낀다.
과연 평론가들은 이런 대중들의 감상이나 추억에 대해서 생각이나 할까? 그들은 영화를 보고 혹시 혹평할 거리만 찾는 것은 아닐까? 무엇인가 자신들이 좀더 뛰어나고 살아있다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것이라면 나처럼 아예 보지 않는 것이 좋다.
4. 진중권의 스토리 부재론에 반론
진중권은 토론에서 영화가 스토리가 없다고 했다. 그 근거로 스포일러에 가깝게 스토리를 다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여자 하나 구하자고 군단에 가까운 괴물들이 나오냐고, 그게 말이 되냐고 했다. 그 이야기는 개연성이 없으니 스토리가 없다는 것이다. 개연성이란 현실에 있을 법한 그런 성질이다. 즉 스토리가 개연성이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디워는 개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워의 이무기는 뭔가? 그게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인가? 개연성이 있는가?
진중권은 장르에 충실하라고 한다.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SF아닌가? 그리고 디워는 SF에 충실했고.. 그렇다면 진중권이 SF에 충실한 영화를 혹시 역사영화나 연애영화로 본 것은 아닐까. 대략 그의 안목에 안습이다.
그리고 삼백은 플롯이 있다고 한다. 삼백은 봤지만 내 느낌에는 예술이고 나발이고 없다. 그냥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삼백은 있다인데, 디워는 없다고만 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시민논객이 찾은 근거에는 진중권이 삼백에 스토리가 적다고 쓴 글이 있다. 이건 모순이 아니라 조삼모사일뿐이다. 난간한 상황이니 근거가 없을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여자하나때문에 군단급 이상이 싸운 전쟁이 있다. 바로 헬레네를 두고 벌어진 트로이 전쟁이다. 이에 대한 소설도 있고 영화도 만들고 하니 개연성을 넘어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거 아닌가?
끝으로 아마도 난 디워를 보지 않을 것같다. 우리집 꼴통이 유치원에서 디워 이야기를 듣고 보자고 조르지 않는다면 별반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 그런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얼마전 본 라따뚜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평론에 대한 글을 붙인다. 아마도 이 시점에 적절한 글이 아닌가 싶다.
세상은 새로운 재주나 창작물에 관대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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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면 비평이라는 작업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위험부담이 없을 뿐더러 우리의 평론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젠척 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미있는 나쁜 말들을 잔뜩 적어 놓는다. 하지만 쓴소리를 잘하는 우리 평론가들은 어쩌면 겉모습만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것들이 어쩌면 우리의 비평보다 더 의미가 있는 건인지도 모른다.
비평가들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과 방어이다. 세상은 새로운 재주나 창작물에 관대하지 못하다. 그들은 친구가 필요하다. 나도 어제밤에 새로운 것을 경험했다. 정말 기가 막히게 맛이 있는 소스가 뿌려진 아주 특별한 식사!
음식이나 주방장 모두에 관해 내가 느끼고 있는 추잡한 선입견은 모두 배제한 채 얘기하기로 하겠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므로!
솔직하게 말해 예전에는 믿지 않았다. 구스또주방장의 유명한 좌우명인 누구든지 요리할 수 있다는 말을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어디서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구스또에서 요리하고 있는 그 비천한 요리사를 상상하면 이 평론 자체가 정말 힘들겠지만 감히 말한다, 그는 프랑스의 그 어느 요리사보다도 훌륭하다고!
다시 구스또에 가고싶다. 더 먹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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